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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바보 가족의 전도행전』

 

이민자 권사님(이종일 안수집사님)의 가족이 120개의 도시와 섬을 돌며 예수님을 전한 3년간의 노방전도 이야기가 담긴 “바보 가족의 전도행전”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3년간의 시간 동안 이민자 권사님의 가정이 겪은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과 회개가 터지는 생생한 전도의 현장이 펼쳐집니다. 책의 제목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전도여행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을 뛰어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보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임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이 책에는 ‘정상 그 이상의 바보’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의 아름다운 꽃들이 산간벽지에서 피어나는 감동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순종은 하면서도 120개 도시와 섬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던지 나는 울고 나가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약한 자를 사용하시다니”(p.314)

이민자 권사님 가족의 고백처럼, 순종은 쉽지 않은 믿음의 실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많은 복음의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수고하며, 눈물로 순종할 수 있는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이민자 권사님의 가족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어지길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애타게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묵상5 – 십일조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십일조는 구약 이스라엘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오늘의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구약의 개념으로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이나 신약 성경에 기록된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와 연관된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첫 번째’ 혹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주님께 감사함으로 돌리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십일조를 전체에 대한 대표성의 개념에서 본다면 그 정신을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의미로 십일조를 드릴 때,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또한 십일조를 복과 연관시키는 것은 신앙을 개인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십일조는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복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말 3:10`12). 그러나 십일조를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복은 성도의 행위에 의해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뜻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며, 전 실존의 신앙고백이 십일조의 신앙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4 – 겸손은 어떤 것인가요?

‘겸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흔히 말씨가 부드럽다거나 성품이 온유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교회에서 ‘겸손하라’고 하면 언행을 조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겸손의 의미를 너무 개인의 품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겸손은 개인의 언어 사용이나 성격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이 의미하는 ‘낮아짐’은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낮아짐이라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겸손은 한 인간의 품성이나 도덕적 삶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아가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겸손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좇아 사는 사람에게 타인에 대한 태도로서 ‘낮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봉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굶주리고, 갇히고, 고통당하며, 비인간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가난한 자’ 혹은 ‘이웃’이라고 부릅니다. 겸손은 낮아진 자로서 이웃에 대한 섬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렇듯 겸손은 인간의 꾸며진 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빌립보서 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3 : 기독교인도 고난을 겪나요?

Businessman protects himself from the crisis.

 

신실한 신앙인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큰 혼란을 겪습니다. 큰 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는 깊은 좌절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저주로 여기거나 잘못된 신앙생활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나, 하나님의 버림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 합니다. 또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내어놓고 회개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욥은 의인으로서 고난을 겪었으며, 선지자와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신실히 따르고자 할 때 오히려 더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 역시 예수님을 좇고자 할 때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지의 여부를,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그것에 반응하는 모습에서 차이가 납니다. 고난을 당할 때 비 신앙인은 절망하며 때로는 포기하고 고통을 준 대상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신앙으로 응답합니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2 : 죄란 무엇인가요?

 

죄는 기독교에서 현실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한국교회는 죄를 윤리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죄의 윤리적 측면만 강조하면, 죄의 개념이 율법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기독교인의 죄 개념은 다양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의 대한 근본적인 개념 한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죄’란 말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로서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함’을 뜻합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서 마땅히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목표를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일반 사람보다 더 많은 윤리적인 죄를 지어서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가운데 나타난 실존적 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채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과녁을 벗어나 빗나갈 때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근본적인 방향 설정 없이 윤리적인 죄만을 강조하면 율법적이고 바리새인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윤리적인 흠이 없거나 특별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지라도 삶의 방향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과 다르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때 회개는 전 실존의 삶과 관계되어 나타나는 방향의 전환을 말합니다. 죄의 용서는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선행만으로는 죄 사람을 받지 못합니다. 선행은 죄 사함의 조건이 아니라, 죄 사함 받은 자가 감사의 응답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9-21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묵상-1 : 신앙이 뭐죠?

Purple flower growing on crack street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감정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병 치유와 같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 이런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내포합니다. 

‘신앙생활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구체적으로 삶과 연결되지 않거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공허해지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좋은 신앙인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의 척도는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출석을 해도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에 구체성이 없으면 신앙은 활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인이란, 바른 기독교적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관은 길러집니다.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도 오랜 훈련과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확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면, 기독교적 가치관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리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