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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복음심기 캠페인

『방방곡곡 복음심기』 캠페인에
영세교회가 참여합니다

2022년도에 우리 영세교회는 ‘복음의 전함’이라는 선교단체에서 진행하는 외벽 복음광고 캠페인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교회 외벽에 복음광고 현수막을 부착하고 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지역사회에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외벽을 지역 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광고판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께 나눠드리는 스티커와 자석판 등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부착하여 복음의 통로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볼까’라는 검색어로 검색을 하면 TV에서 만나는 친근한 얼굴들이나 목사님들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도록 복음광고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전하기 어려울 때 이 복음광고는 복음을 들어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전국의 5천 여 교회가 이 사역에 동참하고 있으며 해외의 유명한 거리에도 이 복음광고들이 게시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 영세교회도 이 사역에 함께 동참하여 교회의 외벽을 지역사회에 내놓고자 합니다. 부디 우리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럽)

(북미)

(방방곡곡 복음심기 캠페인)

(중화동 영세교회)

기도의 불빛

기도의 불빛

                                         김 영월

크리스마스 트리등이 반짝인다
한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어두운 세상
밝게 비춘다
그 하나하나의 깜박이는 불빛
우리 성도들의 기도이다
 
코로나 19로 신음하는 지구촌을
불쌍히 여기시고
온전한 일상을 어서 회복케 하소서
삶에 지치고 질병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해방시켜 주옵소서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을
찬양하는 불빛
성탄의 기쁨을 온 누리에 전할 때
주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
우리 안에 차고 넘친다

복음과 성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

“경건한 영혼들은 성례로부터 큰 확신과 기쁨을 얻는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증거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것이 된다. 그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업인 영생이 우리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하고 계신 천국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을 수 없듯, 우리 역시 천국을 빼앗기지 않을 것임을 확신케 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키셨기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더는 정죄당하지 않음을 확신케 된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자비로 그가 우리를 초청하여 행하신 놀라운 맞바꿈이다. 즉, 그가 인자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또한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유한함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무한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약함을 취하시고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그의 부를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그의 의로 옷 입혀 주신 것이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2절).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도들 상호 간의 연합을 구현하는 성찬의 역할에 관해 가르칠 때, 칼빈은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을 주석하며 그 둘을 연결시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로 연합되어야 한다”(‘고린도서신 주석’). 또한 기독교강요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고, 그는 우리 모두를 그 몸의 지체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성례에서 우리가 보는 떡이 바로 이 연합을 상징한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이러한 이중적 회복에는 어떤 실제적인 효과가 있을까요? 성찬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고 우리 상호간의 연합을 확증해준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면 성례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악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형제 중 누구라도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거절하고,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형제와 다투는 것은 그리스도와 다투는 것입니다. 셋째,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넷째,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보듯 형제들의 몸도 돌봐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고통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듯,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형제가 악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묵상8 – 경건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곧잘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 행동, 모양, 옷차림새를 보고 경건의 모습을 판단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경건은 인격이나 외적인 모양이 아닙니다. 이런 경건은 교양인들이라면 누그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적 경건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중심에 경외심을 가진 삶’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일 결합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예언자들은 말투가 거칠고 옷 모양도 형편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을 경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표현을 사용하고 수양된 성품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앙적인 삶의 구별이 없다면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경건의 중심을 잃어버린 모습을 종종 봅니다.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행해야 할 구별된 거룩한 목적을 상실하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집단이 됩니다. 예배와 성경 읽기와 기도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없는 자기 만족적인 경건을 일컬어, 루터는 ‘영적 간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외양이나 말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심이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할 때입니다. 

※디모데후서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7 – 복(福)을 구하면 안 되나요?

성경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과 세상적인 복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을 조건부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는 대단히 중요한 계명입니다. 하지만 주일성수를 함으로써 건강과 물질의 복을 받으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의 은총’의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라카’는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은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원하는 자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은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책임성과 소명의 성격을 띱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복은 개인을 위한 복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거룩한 책임성이 있습니다. 복을 이웃과 형제를 위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합당하게 쓰는 것이 바로 복의 책임성입니다. 물질에 대한 복도 중요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물질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주어진 건강도 소명으로 알며 연약한 자를 위해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 6 –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우리는 이웃을 개인화해서 나와 친분이 있거나 혈육, 학연, 지연에 관련된 사람으로 제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웃은 나와 어떤 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웃에 대한 정의를 ‘지금 도움이 필요한 자’, ‘나를 필요로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간적, 사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와 어떤 이해관계나 개인적 관계도 없지만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바로 나의 이웃이며, 또한 그러한 사람을 돌아보고 그를 도울 때, 내가 바로 그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범위를 개인적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타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야는 매우 폭넓게 봐야 하지만, 실천은 매우 작은 것, 구체적인 것부터 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웃을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떠다줄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가질 때, 그리고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할 때, 먼 나라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 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며 공동체적 이웃사랑을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누가복음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