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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8 – 경건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곧잘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 행동, 모양, 옷차림새를 보고 경건의 모습을 판단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경건은 인격이나 외적인 모양이 아닙니다. 이런 경건은 교양인들이라면 누그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적 경건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중심에 경외심을 가진 삶’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일 결합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예언자들은 말투가 거칠고 옷 모양도 형편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을 경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표현을 사용하고 수양된 성품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앙적인 삶의 구별이 없다면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경건의 중심을 잃어버린 모습을 종종 봅니다.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행해야 할 구별된 거룩한 목적을 상실하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집단이 됩니다. 예배와 성경 읽기와 기도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없는 자기 만족적인 경건을 일컬어, 루터는 ‘영적 간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외양이나 말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심이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할 때입니다. 

※디모데후서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7 – 복(福)을 구하면 안 되나요?

성경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과 세상적인 복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을 조건부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는 대단히 중요한 계명입니다. 하지만 주일성수를 함으로써 건강과 물질의 복을 받으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의 은총’의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라카’는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은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원하는 자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은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책임성과 소명의 성격을 띱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복은 개인을 위한 복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거룩한 책임성이 있습니다. 복을 이웃과 형제를 위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합당하게 쓰는 것이 바로 복의 책임성입니다. 물질에 대한 복도 중요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물질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주어진 건강도 소명으로 알며 연약한 자를 위해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 6 –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우리는 이웃을 개인화해서 나와 친분이 있거나 혈육, 학연, 지연에 관련된 사람으로 제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웃은 나와 어떤 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웃에 대한 정의를 ‘지금 도움이 필요한 자’, ‘나를 필요로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간적, 사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와 어떤 이해관계나 개인적 관계도 없지만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바로 나의 이웃이며, 또한 그러한 사람을 돌아보고 그를 도울 때, 내가 바로 그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범위를 개인적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타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야는 매우 폭넓게 봐야 하지만, 실천은 매우 작은 것, 구체적인 것부터 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웃을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떠다줄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가질 때, 그리고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할 때, 먼 나라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 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며 공동체적 이웃사랑을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누가복음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책 소개 : 『바보 가족의 전도행전』

 

이민자 권사님(이종일 안수집사님)의 가족이 120개의 도시와 섬을 돌며 예수님을 전한 3년간의 노방전도 이야기가 담긴 “바보 가족의 전도행전”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3년간의 시간 동안 이민자 권사님의 가정이 겪은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과 회개가 터지는 생생한 전도의 현장이 펼쳐집니다. 책의 제목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전도여행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을 뛰어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보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임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이 책에는 ‘정상 그 이상의 바보’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의 아름다운 꽃들이 산간벽지에서 피어나는 감동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순종은 하면서도 120개 도시와 섬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던지 나는 울고 나가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약한 자를 사용하시다니”(p.314)

이민자 권사님 가족의 고백처럼, 순종은 쉽지 않은 믿음의 실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많은 복음의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수고하며, 눈물로 순종할 수 있는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이민자 권사님의 가족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어지길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애타게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묵상5 – 십일조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십일조는 구약 이스라엘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오늘의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구약의 개념으로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이나 신약 성경에 기록된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와 연관된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첫 번째’ 혹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주님께 감사함으로 돌리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십일조를 전체에 대한 대표성의 개념에서 본다면 그 정신을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의미로 십일조를 드릴 때,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또한 십일조를 복과 연관시키는 것은 신앙을 개인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십일조는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복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말 3:10`12). 그러나 십일조를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복은 성도의 행위에 의해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뜻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며, 전 실존의 신앙고백이 십일조의 신앙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4 – 겸손은 어떤 것인가요?

‘겸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흔히 말씨가 부드럽다거나 성품이 온유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교회에서 ‘겸손하라’고 하면 언행을 조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겸손의 의미를 너무 개인의 품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겸손은 개인의 언어 사용이나 성격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이 의미하는 ‘낮아짐’은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낮아짐이라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겸손은 한 인간의 품성이나 도덕적 삶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아가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겸손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좇아 사는 사람에게 타인에 대한 태도로서 ‘낮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봉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굶주리고, 갇히고, 고통당하며, 비인간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가난한 자’ 혹은 ‘이웃’이라고 부릅니다. 겸손은 낮아진 자로서 이웃에 대한 섬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렇듯 겸손은 인간의 꾸며진 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빌립보서 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3 : 기독교인도 고난을 겪나요?

Businessman protects himself from the crisis.

 

신실한 신앙인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큰 혼란을 겪습니다. 큰 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는 깊은 좌절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저주로 여기거나 잘못된 신앙생활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나, 하나님의 버림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 합니다. 또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내어놓고 회개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욥은 의인으로서 고난을 겪었으며, 선지자와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신실히 따르고자 할 때 오히려 더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 역시 예수님을 좇고자 할 때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지의 여부를,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그것에 반응하는 모습에서 차이가 납니다. 고난을 당할 때 비 신앙인은 절망하며 때로는 포기하고 고통을 준 대상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신앙으로 응답합니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2 : 죄란 무엇인가요?

 

죄는 기독교에서 현실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한국교회는 죄를 윤리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죄의 윤리적 측면만 강조하면, 죄의 개념이 율법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기독교인의 죄 개념은 다양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의 대한 근본적인 개념 한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죄’란 말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로서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함’을 뜻합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서 마땅히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 목표를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일반 사람보다 더 많은 윤리적인 죄를 지어서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가운데 나타난 실존적 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채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과녁을 벗어나 빗나갈 때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근본적인 방향 설정 없이 윤리적인 죄만을 강조하면 율법적이고 바리새인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윤리적인 흠이 없거나 특별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지라도 삶의 방향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과 다르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때 회개는 전 실존의 삶과 관계되어 나타나는 방향의 전환을 말합니다. 죄의 용서는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선행만으로는 죄 사람을 받지 못합니다. 선행은 죄 사함의 조건이 아니라, 죄 사함 받은 자가 감사의 응답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9-21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묵상-1 : 신앙이 뭐죠?

Purple flower growing on crack street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감정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병 치유와 같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 이런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내포합니다. 

‘신앙생활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구체적으로 삶과 연결되지 않거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공허해지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좋은 신앙인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의 척도는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출석을 해도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에 구체성이 없으면 신앙은 활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인이란, 바른 기독교적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관은 길러집니다.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도 오랜 훈련과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확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면, 기독교적 가치관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리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