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복음과 성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

“경건한 영혼들은 성례로부터 큰 확신과 기쁨을 얻는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증거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것이 된다. 그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업인 영생이 우리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하고 계신 천국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을 수 없듯, 우리 역시 천국을 빼앗기지 않을 것임을 확신케 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키셨기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더는 정죄당하지 않음을 확신케 된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자비로 그가 우리를 초청하여 행하신 놀라운 맞바꿈이다. 즉, 그가 인자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또한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유한함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무한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약함을 취하시고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그의 부를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그의 의로 옷 입혀 주신 것이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2절).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도들 상호 간의 연합을 구현하는 성찬의 역할에 관해 가르칠 때, 칼빈은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을 주석하며 그 둘을 연결시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로 연합되어야 한다”(‘고린도서신 주석’). 또한 기독교강요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고, 그는 우리 모두를 그 몸의 지체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성례에서 우리가 보는 떡이 바로 이 연합을 상징한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이러한 이중적 회복에는 어떤 실제적인 효과가 있을까요? 성찬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고 우리 상호간의 연합을 확증해준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면 성례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악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형제 중 누구라도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거절하고,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형제와 다투는 것은 그리스도와 다투는 것입니다. 셋째,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넷째,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보듯 형제들의 몸도 돌봐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고통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듯,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형제가 악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묵상8 – 경건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곧잘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 행동, 모양, 옷차림새를 보고 경건의 모습을 판단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경건은 인격이나 외적인 모양이 아닙니다. 이런 경건은 교양인들이라면 누그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적 경건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중심에 경외심을 가진 삶’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일 결합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예언자들은 말투가 거칠고 옷 모양도 형편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을 경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표현을 사용하고 수양된 성품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앙적인 삶의 구별이 없다면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경건의 중심을 잃어버린 모습을 종종 봅니다.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행해야 할 구별된 거룩한 목적을 상실하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집단이 됩니다. 예배와 성경 읽기와 기도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없는 자기 만족적인 경건을 일컬어, 루터는 ‘영적 간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외양이나 말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심이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할 때입니다. 

※디모데후서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7 – 복(福)을 구하면 안 되나요?

성경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과 세상적인 복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을 조건부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는 대단히 중요한 계명입니다. 하지만 주일성수를 함으로써 건강과 물질의 복을 받으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의 은총’의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라카’는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은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원하는 자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은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책임성과 소명의 성격을 띱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복은 개인을 위한 복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거룩한 책임성이 있습니다. 복을 이웃과 형제를 위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합당하게 쓰는 것이 바로 복의 책임성입니다. 물질에 대한 복도 중요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물질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주어진 건강도 소명으로 알며 연약한 자를 위해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 6 –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우리는 이웃을 개인화해서 나와 친분이 있거나 혈육, 학연, 지연에 관련된 사람으로 제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웃은 나와 어떤 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웃에 대한 정의를 ‘지금 도움이 필요한 자’, ‘나를 필요로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간적, 사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와 어떤 이해관계나 개인적 관계도 없지만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바로 나의 이웃이며, 또한 그러한 사람을 돌아보고 그를 도울 때, 내가 바로 그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범위를 개인적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타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야는 매우 폭넓게 봐야 하지만, 실천은 매우 작은 것, 구체적인 것부터 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웃을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떠다줄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가질 때, 그리고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할 때, 먼 나라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 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며 공동체적 이웃사랑을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누가복음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책 소개 : 『바보 가족의 전도행전』

 

이민자 권사님(이종일 안수집사님)의 가족이 120개의 도시와 섬을 돌며 예수님을 전한 3년간의 노방전도 이야기가 담긴 “바보 가족의 전도행전”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3년간의 시간 동안 이민자 권사님의 가정이 겪은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과 회개가 터지는 생생한 전도의 현장이 펼쳐집니다. 책의 제목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전도여행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을 뛰어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보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임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이 책에는 ‘정상 그 이상의 바보’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의 아름다운 꽃들이 산간벽지에서 피어나는 감동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순종은 하면서도 120개 도시와 섬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던지 나는 울고 나가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약한 자를 사용하시다니”(p.314)

이민자 권사님 가족의 고백처럼, 순종은 쉽지 않은 믿음의 실제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많은 복음의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수고하며, 눈물로 순종할 수 있는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이민자 권사님의 가족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어지길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애타게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묵상5 – 십일조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십일조는 구약 이스라엘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오늘의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구약의 개념으로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이나 신약 성경에 기록된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와 연관된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첫 번째’ 혹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주님께 감사함으로 돌리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십일조를 전체에 대한 대표성의 개념에서 본다면 그 정신을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의미로 십일조를 드릴 때,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또한 십일조를 복과 연관시키는 것은 신앙을 개인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십일조는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복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말 3:10`12). 그러나 십일조를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복은 성도의 행위에 의해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뜻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며, 전 실존의 신앙고백이 십일조의 신앙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

묵상4 – 겸손은 어떤 것인가요?

‘겸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흔히 말씨가 부드럽다거나 성품이 온유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교회에서 ‘겸손하라’고 하면 언행을 조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겸손의 의미를 너무 개인의 품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겸손은 개인의 언어 사용이나 성격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이 의미하는 ‘낮아짐’은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낮아짐이라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겸손은 한 인간의 품성이나 도덕적 삶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아가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겸손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좇아 사는 사람에게 타인에 대한 태도로서 ‘낮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봉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굶주리고, 갇히고, 고통당하며, 비인간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가난한 자’ 혹은 ‘이웃’이라고 부릅니다. 겸손은 낮아진 자로서 이웃에 대한 섬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렇듯 겸손은 인간의 꾸며진 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빌립보서 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