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부] 11월 7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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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부] 11월 7일 (주일)
[고등부] 11월 7일(주일)
에스겔 37장 5절
사랑이 발목까지 차오르면
와 하나님이다
복음과 성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
“경건한 영혼들은 성례로부터 큰 확신과 기쁨을 얻는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증거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것이 된다. 그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업인 영생이 우리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하고 계신 천국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을 수 없듯, 우리 역시 천국을 빼앗기지 않을 것임을 확신케 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키셨기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더는 정죄당하지 않음을 확신케 된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자비로 그가 우리를 초청하여 행하신 놀라운 맞바꿈이다. 즉, 그가 인자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또한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유한함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무한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약함을 취하시고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그의 부를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그의 의로 옷 입혀 주신 것이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2절).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도들 상호 간의 연합을 구현하는 성찬의 역할에 관해 가르칠 때, 칼빈은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을 주석하며 그 둘을 연결시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로 연합되어야 한다”(‘고린도서신 주석’). 또한 기독교강요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고, 그는 우리 모두를 그 몸의 지체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성례에서 우리가 보는 떡이 바로 이 연합을 상징한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이러한 이중적 회복에는 어떤 실제적인 효과가 있을까요? 성찬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고 우리 상호간의 연합을 확증해준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면 성례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악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형제 중 누구라도 상하게 하고, 멸시하고, 거절하고,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형제와 다투는 것은 그리스도와 다투는 것입니다. 셋째,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넷째,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보듯 형제들의 몸도 돌봐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고통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듯,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형제가 악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강요’ 4권 17장 38절).
묵상8 – 경건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곧잘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 행동, 모양, 옷차림새를 보고 경건의 모습을 판단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경건은 인격이나 외적인 모양이 아닙니다. 이런 경건은 교양인들이라면 누그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적 경건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중심에 경외심을 가진 삶’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일 결합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예언자들은 말투가 거칠고 옷 모양도 형편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을 경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표현을 사용하고 수양된 성품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앙적인 삶의 구별이 없다면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경건의 중심을 잃어버린 모습을 종종 봅니다.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행해야 할 구별된 거룩한 목적을 상실하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집단이 됩니다. 예배와 성경 읽기와 기도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없는 자기 만족적인 경건을 일컬어, 루터는 ‘영적 간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외양이나 말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구별된 목적과 경외심이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할 때입니다.
※디모데후서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출처: 김동건∙최병천 저, 『신학이 있는 묵상 1권』